요즘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정말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요리사들의 화려한 실력과 스타들의 냉장고에서 나오는 귀한 식재료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평범하다 못해 발에 채이는 재료들로 상상도 못 했던 요리를 만들어 내는 장면입니다. 생생우동으로 튀김 요리를 만들어 낼 때는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거든요. 사실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완전히 다른 글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소년과 로봇. 제가 이 단어를 보고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철인 28호나 K캅스 정도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법한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까요? 그런데 로보틱스 노츠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체 악당들과의 싸움은 언제 시작하나 싶을 정도로 예상을 깨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오늘은 로보틱스 노츠 엘리트라는 이름을 달고 PS Vita로 돌아온 이 이야기에 대해서 말해볼까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오프닝은 역시 애니메이션이 제맛. |
조유진 누님의 목소리도 함께 감상하자. |
여자 주인공인 세노미야 아키호. |
배경이 되는 시대는 2019년. 그렇게 머지않은 미래입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기술이 저렇게 발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주 황당하지만은 않은, 어느 정도는 구현되어 있거나 현재 연구 중인 기술들이 등장해서 오버 테크놀러지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설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장소적 배경이 되는 곳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즈넉한 섬마을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곳들이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시기와 장소의 역설적인 만남이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들도 언뜻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풋풋한 학생들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 과학과 로봇에 관한 이야기, 음모와 미스터리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이런 난감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어느 하나 혼자 튀는 법이 없이 균형 있게, 은은하게, 느긋하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들이 얽히고설켜서 큰 서사와 감동을 이뤄내죠. 곳곳에 배치된 역설이 오히려 은은하게 빛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 아마 이 모습 또한 역설이 아닐까요?
어울리지 않는 장소와 장치가 어울려 있는 독특한 세상 |
아이들의 드라마가 미스터리와 어울려 있는 독특한 이야기 |
이런 조화 덕분에 각각의 소재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이 어느 정도 상쇄됩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능력이 자칫 유치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측은함을 자아내고, 터무니없게 느껴질 수 있는 로봇에서도 청춘이 흘린 땀과 눈물을 느낄 수 있거든요. 마냥 밝기만 하지도 않고 마냥 슬프기만 하지도 않은 분위기도 아마 이런 점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넣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탓에 생기는 단점도 더러 있습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등장 인물들의 관계를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 하고,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알려줘야 합니다. 보통은 이럴 때 인물 간의 대화 속에 암시를 넣어 추론하게 하거나, 궁금증을 일으킨 뒤에 넣어둔 사전을 스스로 읽어보게 하는 방법을 써서 대사가 늘어지는 것을 피하죠. 하지만 로보틱스 노츠 엘리트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하나하나 설명하는 방법을 택했더군요. 이 점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예쁜 동생들이 나와서 너무 행복하다. 콥스 파티 때의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 |
하지만 사실 예쁜 누님들이 내 취향. |
전개가 지나치게 느리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선 20분 만에 끝났던 사건이 게임에선 1시간이 넘어도 끝이 안 나더군요. 소소한 대화가 사이사이에 많이 들어갑니다. 만약 애니메이션을 먼저 봤다면 알았으니까 대충하고 넘어가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텍스트로 진행하는 게임의 특성상 행동으로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워서 읽다가 잠들어서 PS Vita를 얼굴에 떨어뜨린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1세대 기기라서 많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천천히 자세하게 진행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인물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적이 꽤 많았는데, 게임을 해보니까 왜 그렇게 이어지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아무래도 게임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쳐낸 부분이 많았나 봅니다. 그리고 길고 긴 독백 덕분에 특정 상황에서 그 캐릭터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던 점도 괜찮았고, 감정의 미묘한 변화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빠른 전개보다 이런 스타일을 더 선호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3D 모델링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특히 아키는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난다. |
증강현실이나 SNS 같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술들이 많이 등장하는 편. |
너무 식상한 성격의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긴 합니다.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카이토와 아키호는 좀 심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인물들이 엮여가는 관계가 흥미를 불러일으켜서 그 점이 큰 문제가 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끔은 전형적인 캐릭터가 안정적인 재미를 주기도 하죠. 그래도 아키호는 애니메이션 버전에서처럼 조금 더 활발하고 열정적이고 웃기는 캐릭터였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게임에서의 아키호는 보고 있으면 좀 명치가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예쁘니까 무죄입니다.
그렇다고 재미있는 캐릭터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저는 히키코모리에다가 변태적인 면도 보이는 프라우 코지로가 정말 마음에 들더군요. 4차원적인 행동과 듀후후 하는 웃음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터치 한 번에 다른 성격이 되어버리는 아이리도 재밌는 캐릭터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답답하고 식상하고 신선한 여러 캐릭터들이 어우러져서 꽤 괜찮더군요.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장면들이 게임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아니 그 반대인가? |
그림체가 괜찮아서 감상할만한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
사실 그래픽 기술 면에선 마땅히 내세울 만한 점이 없습니다. 배경은 모두 2D 일러스트고 그 앞에서 3D로 모델링된 캐릭터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전부니까요. 게다가 가끔 얼굴과 몸에 생기는 음영이 너무 어색할 때가 있기도 하니, 기술적으로 좋은 그래픽이라 말하긴 힘듭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움직임이 꽤 부드럽고 아키호의 경우엔 섬세한 머리카락 표현이나 다양한 동작이 구현된 점은 괜찮은 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을 떠나서 미술적으로 느껴지는 전체적인 인상은 상당히 뛰어나 보이더군요. 섬마을의 아름다운 경관과 시골 느낌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편안한 느낌을 주고, 투박하지만 정이 가는 로봇 디자인도 나름의 느낌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 캐릭터들의 예쁜 일러스트인데, 상의가 아주 약간 올라간 상태나 치마가 살짝 들리는 장면이 가끔 나오거든요. 이게 은근히 사람을 심쿵하게 만듭니다. 숨겨왔던 나의 덕심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줄 알았죠. 그래서 그래픽은 점수를 잘 줄 수밖에 없습니다. 흠흠.
감성이 묻어나는 대사들이 자주 나온다. 너무 오글거려 하지 말자. |
자꾸 이런저런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느라 산만한 느낌이 드는 것이 단점. |
배경 음악이나 효과음은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입니다. 분위기에 딱 맞는 아름다운 곡들이 많고 특히 피아노 한 대나 타악기 위주의 소박한 곡들이 꽤 인상적이더군요. 성우들의 연기도 크게 흠 잡을 만한 구석이 없고 더빙된 부분도 상당한 편이라서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저는 특히 프라우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성우가 누군지 찾아볼 정도로요. 찾아보니까 개그 만화 보기 좋은 날에 많이 나왔던 성우더군요. 어쩐지 웃음소리가 비슷하더라니. 듀후후.
좀 식상한 캐릭터들도 많이 나오지만 그래도 매력이 있다. |
정말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 프라우 코지로. |
이런 장르에 속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게임인 이상, 게임 플레이 파트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규칙까진 만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선택지를 고르는 재미라도 있어야죠. 로보틱스 노츠 엘리트에도 게임 플레이라 부를 것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진 않더군요. 특히 킬배럴 전투에서 화면에 뜨는 버튼 누르는 미니 게임은 재미도 없고 긴장도 없었던 경험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로보틱스 노츠 엘리트에도 분기가 있긴 합니다. 그것도 꽤 다양한 분기가 있죠. 하지만 보통 다른 게임들이 선택지로 분기를 가르는 것에 반해, 이 게임은 SNS 답장으로 분기를 가르는 독특한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답장 내용과 스토리가 개연성이 별로 없는 경우가 꽤 많아서 어떤 답장을 보내야 하는지 짐작하기가 꽤 힘들고, 직접 트위포라는 앱에 들어가서 보내야 해서 깜빡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게임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플레이어가 관찰한 현재 상황과 주어진 선택지의 내용을 연결시켜서 내리는 결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연 로보틱스 노츠 엘리트의 분기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로봇의 화려한 동작 덕분에 보는 맛이 있는 킬배럴. |
하지만 이런 미니 게임은 썩 반갑지 않다. |
과한 욕심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PS Vita로 이식하는 과정에서 PS Vita의 기능을 활용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다른 게임이라면 이런 말을 안 할 텐데, 이 게임은 중간에 터치를 하거나 마이크에 대고 말하라는 지시가 가끔 나오는 편이거든요. 근데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 속 주인공이 다 알아서 하더군요. 화면에서 시키는 대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가 민망함이 밀려왔습니다. 아이리를 직접 터치하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제 마음 이해해주실 분이 분명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래도 PS Vita의 터치 스키린을 활용해서 스킵 모드와 자동 모드에 들어갈 수 있는 점은 괜찮은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거라도 감지 덕지죠. 그런데 설명서에 적힌 대로 스크린을 터치했을 때 대사가 넘어갈 때도 있고 안 넘어갈 때도 있어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게 버그인지 제 PS Vita가 명을 다 한 건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그 외에도 아날로그 스틱이나 방향키로 대사 넘기는 기능도 좋았습니다. 한 손가락으로 계속 누르다 보면 손가락이 좀 아프거든요.
여기까지 볼 때는 그냥 정성이 가득한 현지화라고만 생각했는데… |
정성이 가득하다 못해 뚝뚝 흘러내리는 한글화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
편의를 위한 다른 시스템들은 만족스러운 수준입니다. 흔히 지원하는 지난 대사 읽기와 지난 음성 재생도 지원하고 자동 모드나 스킵 모드도 있죠. 다만 강제 스킵 버튼의 감도가 조금만 낮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살짝 눌렀다 뗐는데 꽤 많이 넘어가더군요. 조작 체계 변경이나 캐릭터별 음성 출력 설정 기능 등 부수적인 기능들도 모두 좋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편의성에서 한국어화가 제일 중요하겠죠. 번역이 정말 잘 된 것 같습니다. 캐릭터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다양한 어투로 작업했고, 텍스트뿐만 아니라 이미지도 한국어로 고쳐서 깔끔해 보입니다. 조금, 아주 조금 손톱만큼 아쉬운 점은 원래 자막이 안 나오는 대사는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콥스 파티 블러드 드라이브 때는 그런 부분도 따로 자막을 넣어줬거든요. 근데 지금 정도만 해도 아주 훌륭합니다. 현지화에 힘써주신 많은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실감 나게 번역한 채팅 은어에서 전문적인 단어가 많은 문장까지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
전자 매뉴얼도 한 번 읽어보자. 간략한 스토리 소개와 캐릭터 설정도 볼 수 있다. |
평소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게임에서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 말이죠. 논란이 있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토리의 중요성에 대해 약간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하지만 비주얼 노벨 같은 장르는 언제나 예외입니다. 당연히 여기선 스토리가 무척 중요하죠. 그리고 이 게임은 독특한 소재와 흥미로운 설정, 그리고 꽤 괜찮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화면으로 말이죠. 감정의 변화와 의미심장한 대사들을 섬세하게 음미하며 천천히 익어가는 이야기를 즐기시는 분들은 꼭 해보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와 좀 더 극적인 스토리가 더 취향에 맞으시는 분들께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초반에 견디기 힘들어 보이거든요. 한 3시간 정도? 그래도 그 부분만 참는다면 나중엔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텍스트로 진행하는 게임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게임 플레이는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하지만 굳이 게임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라도 한 번쯤 보셨으면 합니다. 요즘 편당 600원에 쉽게 구할 수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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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트위포 답장 보냈더니 로리콘 엔딩이 나왔다. 다시 프롤로그부터 진지하게 했는데 또 로리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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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한국어 오프닝 조으당....귀로 임신할것같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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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분기를 트위포 답변으로 결정하는건 진짜 암만 생각해도 정신 나간 발상인듯. 공략 안보고 순서대로 분기 찍는게 가능은 합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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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게 다 극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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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 코지로 다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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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분기를 트위포 답변으로 결정하는건 진짜 암만 생각해도 정신 나간 발상인듯. 공략 안보고 순서대로 분기 찍는게 가능은 합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 | 15.10.17 0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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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트위포 답장 보냈더니 로리콘 엔딩이 나왔다. 다시 프롤로그부터 진지하게 했는데 또 로리콘이 되었다. | 15.10.17 09: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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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게 다 극혐이네;; | 15.10.26 07: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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