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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 불사
1
햇살에 이끌려 눈이 뜨였다.
나른한 잠기운 탓에 멍한 시야에 비치는 건, 익숙한 자신의 방의 광경이었다. 하얀 벽지로 둘러싸인 서양식 구조에, 동쪽으로 나 있는 창문과 거기 걸린 파란 커튼.
위화감 없는 기상에 나오토는 하품하며 낡은 베개에 얼굴을 눌러 붙이고 따끈해진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좀 더 자고 싶었다. 아직 졸리다.
근데 지금 몇 시지.
“…진짜 몇 시야?!”
허둥지둥 일어난 나오토는 머리맡에 놓인 알람시계를 낚아채듯 붙잡았다.
어쩐지 알람이 울릴 시간은 훨씬 지났을 듯한 해의 높이가 아닌가. 어쩌면 다른 일이 있어 하루카가 먼저 학교에 가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칫하다간 지각이다.
거기까지 순식간에 생각하고 몸을 일으켜 나오토는 역시 순식간에 수많은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오늘 쉬는 날이었지.”
손에 쥔 시계의 긴 침과 짧은 침이 현재 시각이 9시 30분 쯤임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표시된 날짜 부분에는 붉은 글씨로 『SUN』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안심은 지극히 짧고 덧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보다 먼저 눈을 마주해야 할 것들이 잔뜩 있다.
우선 옷이다. 평소에 나오토는 잘 때 티셔츠와 체육복 바지라는 차림으로 갈아입고 잠든다. 어지간히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평상복을 입은 채로 잠드는 일은 없다. 진정되지도 않고 잘 잤다는 기분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날의 나오토는 교복 차림이었다. 바지는 물론이고 윗옷까지 입은 채다. 교복은 굉장히 더럽고 여기저기 헤져 도저히 입고 학교에 갈 만한 상태가 아니다.
특히 오른쪽 소매가 심각하다. 어깨 바로 아래쯤부터 찢어져 무참한 반팔 상태가 되어 있다.
나오토는 험악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다시 손에 든 시계를 본다. 언제나 가증스러운 소리로 나오토를 꿈나라에서 강제로 끌어올려 주는 정든 시계다.
─그 시계를 쥐고 있는 손은 오른손이었다.
“…꿈인지 아닌지 딱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요청을 내뱉는다.
의외로 기억은 똑바로 난다.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어제 일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망치는 소녀와 쫓는 남자를 보고 그대로 뒤쫓았다. 쫓아간 곳에서 휘말린 액션영화의 클라이맥스 씬 같은 사건은 이게 또 현실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초현실적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꿈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 때 마신 공기의 맛도, 느낀 기분 나쁜 분위기도. 등골에 전해지는 긴박감도 뺨을 스쳐 날아다니는 돌덩이의 풍압도.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남자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벌레가 한순간에 나오토의 팔을 잡아 뜯었을 때 정신을 갉아먹던 듯한 장렬한 통증도 그 이상의 공포도 마찬가지다.
살짝 시계를 침대에 내려놓고 나오토는 빈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피부색이고 평범한 팔. 손가락도 다섯 개 있다. 힘을 넣으면 손가락이 움직이고 주먹을 쥐는 것도 가능하다.
“어떻게… 된 거야?”
오른팔은 틀림없이 달려있다. 그럼 꿈이었나. 기묘한 괴물한테 팔을 물어 뜯겼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런 사실 따윈 없었다고 한다면 기꺼이 그 설을 받아들이지.
하지만 교복의 몰골이 그것을 부정한다. 너덜너덜해진 교복은 어떻게 봐도 심상찮은 짓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러워 진건 흙이나 먼지 때문만이 아니다. 튄 핏자국도 남아 있다.
무엇보다, 교복 소매가 팔을 물어뜯긴 곳과 정확하게 똑같은 위치에서 찢어져 있다.
‘그럼 왜 팔이 멀쩡하냐고…. 아니, 애초에 나, 집에는 어떻게 왔지? 왜 교복을 입고 잔거야. 하루카는? 그 여자애는?’
줄줄이 떠오르는 의문이 갈 데없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춤춘다. 하지만 어떤 의문에도 대답해 줄 사람은 없다.
“…우선 뭣 좀 마셔야지.”
툭 하고 팔을 떨어뜨리고 나오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 자고 일어났는데도 왠지 엄청 피곤하다.
꿈이었던 꿈이 아니었던 어쨌든 지금은 상관없다고 치고, 세수부터 하고 홍차라도 타자. 그러지 않으면 정신이 안쪽에서부터 헤집어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전번에 산 세컨드플러쉬 찻잎, 아직 까지도 않았었지? 그냥 오늘 까버릴까.’
적어도 즐거운 생각을 하자. 소중하게 챙겨 둔 제법 좋은 찻잎의 향을 떠올리면서 나오토는 화장실로 향했다.
더러워진 셔츠를 세탁기 위로 던지면서 수도꼭지를 비튼다. 좀 지저분한 상태로 자고 있었단 생각을 하며 손을 씻고 물을 듬뿍 얼굴에 끼얹었다.
자고 일어난 얼굴이 약간 개운해진다. 같이 젖은 앞머리를 양손으로 휙 위로 넘기며 얼굴을 들었다.
“…응?”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나오토는 움직임이 멈췄다.
비치는 건 평범하게 자기 얼굴이다. 막 닦아낸 물이 턱이나 뺨을 타고 흘러 뚝뚝 방울져 떨어진다. 살짝 뭉친 머리카락은 자고 일어나 붕 뜬 상태였다.
그 위에. 『0』이라는 숫자가 떠올라 있다.
“─허?”
『0』이다. 앞머리를 들고 있던 손으로 급하게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본다.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을 쳐다봤다가 다시 한 번 본다.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나오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숫자는 계속 『0』이다.
머리 위의 숫자는 그 사람의 생명력 같은 것을 나타낸다. 숫자가 높으면 그만큼 생명력이 넘친다는 것을, 낮으면 그 사람은 쇠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0』은 죽은 사람의 숫자이며 『0』이라는 것은 살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어, 어? 어?! 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세면대를 내려치듯이 강하게 손을 대고 나오토는 크게 몸을 내밀었다. 이마가 닿을 만큼 가까이까지 얼굴을 대고 거울에 비춘다.
몇 번 봐도 그대로다.
“뭔, 말도 안 돼….”
망연한 목소리가 흘렀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는데.
자연스럽게 어제 본 머리가 벌레같이 변해버린 남자를 떠올린다. 그 자의 머리 위에 있던 숫자도 『0』이었다.
오싹 하고 오한이 퍼졌다. 갑자기, 자신도 그 남자 같은 생물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전율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 전율을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낚아채 갔다.
“소란스럽네. 조금 조용히 해주면 안 될까?”
약간의 불쾌감과 질림. 그런 음색과 함께 바로 옆에서 가벼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무슨 문? 욕실 문.
순식간에 나오토의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이해란 건 이렇게까지 희소한 것이었던가. 상식은 대체 어딜 간 건가.
용수철 장치 같은 움직임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본 나오토는, 그곳에 있을 리 없는 광경에 두려움마저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화장실에 들어왔을 때 샤워기 소리가 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그 때 이상하게 생각 안 했냐. 당연하지, 어떻게 자기가 자고 있을 때 누가 샤워하고 있다는 발상이 나오겠어.
거기엔… 소녀가 서 있었다.
젖은 몸에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은 채 손끝에서 김을 내며 희미한 온기가 피어오른다. 그 피부를 무엇으로도 감출 생각 같은 건 없이 우아하게 욕실에서 탈의실로 걸어 나온다. 허리께를 지나는 긴 머리카락은 금색이다. 세면대 조명을 받아 빛나는 머리카락을 한 떨기 귀에 걸치고 좌우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몸을 훔칠 만 한 건 없어?”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에게 오늘의 추천 요리를 묻는 듯한 태도로 소녀는 나오토에게 위엄있게 묻는다.
태생이 다른 걸 과시하듯 고귀한 행동거지의 소녀다. 유럽의 고성 따위가 어울릴 듯한, 어딘가 작은 나라의 공주님 같은 품격이 맴돈다.
하지만 나오토는, 그런 생각 같은 걸 할 상황이 아니었다.
“꺄…”
손끝 발끝으로 탈출했던 얼이 단박에 몸으로 쳐들어온 듯 했다.
쉽게 말해 패닉이다.
뇌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전기신호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표정근에 속하는 모든 근육을 모조리 끌어모아….
“꺄아아아아──────────악!!”
나오토는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고서 앞뒤 안 돌아보고 방으로 도망쳤다.
2
열이 오른 하얀 도자기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막 끓인 물을 요령 좋게 붓는다. 바로 뚜껑을 닫고, 옅은 노란색 체크무늬 바탕에 담쟁이가 프린트 되어 있는 주전자용 덮개로 보온해 둔 뒤 약 4분.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는 동시에 덮개를 벗긴 주전자를 잡고 나오토는 두 개 놓인 하얀 찻잔에 충분히 맛과 향이 우러나온 홍차를 따랐다.
1학기가 끝나기 조금 전에 산 세컨드플러쉬 다즐링 티다. 그렇다고 나오토가 숨겨둔 유명 브랜드의 고급 찻잎은 아니다. 더 싸고 많이 살 수 있는 평범한 녀석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솜씨로 타면 충분히 맛있다. 컵 안에서 흔들려 파문을 넓히는 붉은 기가 도는 차의 색은 보석처럼 고르고, 거기에서 올라오는 향은 소극적인 화사함을 품고 있다.
컵받침에 놓인 컵에 숟가락을 곁들여 나오토는 그것들을 거실의 탁자에 놓는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회색 소파에 허리를 걸친 소녀가 있었다.
방금까지 씻느라 젖어 있던 금색의 머리카락은 어젯밤 본 것처럼 높은 위치에서 모아 검은색 커다란 리본으로 묶어 두었다. 긴 속눈썹을 두르고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눈은 머리색보다도 제법 깊은 금색으로, 특이한 색 조합은 고양이의 눈동자를 생각나게 했다.
“…변변치 못한 차입니다만.”
홍차를 타는 것엔 익숙하지만 마시는 예절엔 익숙하지 못하다. 이럴 때 뭐라 말해야 하는지 몰라 적당히 입을 놀리며 나오토는 테이블 반대편에 허리를 내렸다. 물론 이쪽엔 소파가 없으니 바닥에 앉는 셈이다.
그 뒤. 화장실에서 알몸의 소녀와 재회한 뒤, 방으로 도망친 나오토는 착란상태로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고 바들바들 떨며 화장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소녀의 모습은 없었고, 다행이다 집에 갔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거실에 들어서니… 거기엔 소파에 앉아 머리를 정리하는 소녀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완전히 편안해 보이는 자세로 나오토에게 마실 것을 주문하고, 나오토가 결국 아무 것도 트집 잡지 못한 채 부엌에서 홍차를 준비해서… 지금 이 상황이다.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고 고급스런 태도로 앉은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알몸이다. 정확힌 그 길고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다.
망토는 외투니까 실내에선 필요 없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대기에, 이 나라에서는 옷을 입지 않은 사람에겐 코트가 필수라는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인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적용시켰다.
그 결과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음』이라는 최악의 사태만큼은 피했지만, 거의 다 보이는 가슴과 배, 신경 써서 가려줄 생각 없는 허리부터 아래쪽은 정말이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한번 보고, 극도의 찝찝함에 눈을 피하고, 나오토는 자기 몫의 홍차를 마신다. 맛있다. 코에 스미는 부드러운 향기가 자포자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오토의 마음을 구원해 주었다.
“어머, 맛있네.”
뿅 하고 들려온 목소리에 나오토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들었다. 컵받침을 손에 들고 컵을 들어 올린 소녀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무래도 맘에 든 모양이다.
“그거 고맙구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컵을 컵받침에 돌려놓고 나오토는 기분을 전환하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 소녀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있다.
“그래서… 말이지. 우선 묻고 싶은데, 넌 누구?”
“상스럽네.”
“허어?!”
즉시 되돌아온 말에 나오토가 달려들 듯이 목소리를 울렸다.
그것을 금발의 소녀가 업신여기듯이 보았다.
“이름을 물을 때에는 우선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 아니면 최소한의 예의도 못 배운 미천한 개라서 그런가?”
흐르는 듯한 매도가 날아온다. 차가운 눈에는 어렴풋한 경멸마저 담긴 것 같다.
나오토의 관자놀이가 들썩였다. 자기가 미천한 개라면 너는 그 개가 탄 홍차를 맛있다며 마시고 있는 건데 그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래선 이야기가 전혀 진전될 것 같지 않으니 목에서 삼켰다.
“…쿠로가네 나오토. 신카와하마 제 1고등학교 학생이고 이 방의 주인입니다만.”
힘없이 말하고 이거면 됐냐 하고 소녀를 본다.
소녀는 개운한 표정으로 우아하게 컵을 컵받침에 내려놓았다.
“내 이름은 라켈 알카드. 뱀파이어야.”
시원하게 돌아온 말에 나오토는 당황했다. 흘긋흘긋 소녀─ 라켈을 보고, 라기보다는 눈이 떨어지질 않아 그대로 짜내듯이 물었다.
“뱀…파이어?”
“흡혈귀란 뜻이야. 무식하네.”
“알거든! 그거 말고! 뭐야 그 웃기는 자기소개. 너 말야, 지금 나 무시하냐?”
테이블에 무릎을 대고 파삭파삭 머리를 휘저으며 나오토는 울컥한 대로 날카롭게 내뱉었다.
뱀파이어, 흡혈귀. 과연, 그거라면 그 말도 안 되는 생명력도 어제의 미친 듯한 액션씬도, 덧붙여 그 이상야릇한 복장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건가. 장난하나.
“물론이야. 그치만 당신, 바보잖아?”
“뭐 임마?!”
“큰 소리 내지 마. 바보 옮을 것 같아.”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듯이 얼굴을 굳히고 라켈은 과장스럽게 몸을 뺀다. 어딘가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이 더더욱 나오토의 화를 돋웠다.
“너 이 자식, 맘대로 남에 집에 들어온 불법침입자 주제에 대단한 태도신데? 지금 당장 경찰 부르면 잡혀가도 할 말 없는 상황인거, 알고나…”
“봤잖아?”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나오토의 말을 라켈은 조용하게 끊었다.
끊은 건 그녀의 말이 아니라 눈빛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커다랗게 개인 눈동자는 나오토의 내용물을 숨김없이 꿰뚫어 보는 듯해 묘한 위압감에 나오토를 당황시켰다.
“봤다니, 뭘…?”
“『이질』을, 말야.”
자연스럽게 나오토가 꿀꺽 하고 목을 울리며 입에 모인 침을 삼켰다.
그것을 지켜보고 라켈이 계속 말한다.
“당신 어제, 나를 보고 놀랐지? 그건 당신의 일상에선 눈에 담을 일이 없었던, 이상한 것을 봤기 때문이었을 거야. …아니, 지금도 당신은 보고 있어. 틀렸어?”
물음에, 나오토는 주의 깊게 입을 다물었다. 이빨을 꽉 다물고 있는 것을 눈치 채이기 싫었다.
그녀의 말 대로 확실히 나오토는 보았다. 아니, 지금도 보인다. 보통 인간에겐 우선 있을 수가 없는 이질, 이상. 라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8자리나 되는 심상치 않은 수치가.
“그 『눈』, 어떻게 된 거야?”
이은 물음에 이번엔 나오토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납득했다. 이 기묘한 자칭 뱀파이어 소녀는 딱히 나오토의 행동이나 발언에서 추측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는 것이다.
“너… 뭘 알고 있는 거냐.”
“그렇네. 기본적인 건 알고 있어. 알고 있다 라기 보단,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하려나. 나는 당신과 이어져 있으니까.”
“무슨 뜻이지?”
나오토의 경계가 의아함으로 바뀐다.
그것을 라켈의 금색 눈동자가 흘끗 질린 듯이 쳐다봤다.
“아까부터 질문만 하네. 조금은 자기 머리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시끄러, 됐으니까 빨랑 말하라고!”
초조해진 나오토는 말했다. 좀 너무 급한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이쪽은 이 상황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이다. 침착하게 정보를 수집해서 그걸 정리할 정도로 이쪽은 느긋하지 못하다.
라켈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었다.
“정말이지, 버릇없는 하인이네. 덤으로 기억력도 나쁜 것 같고. 잊어버린 거니? 어제, 나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이라니, 뭐가….”
있었다고 해봐야 그 안면벌레남에게 죽을 뻔 했던 것 정도다. 그리 대답하려다, 나오토는 문득 기억해냈다.
안면벌레남에게 죽을 뻔 하고, 그 다음 어떻게 됐더라. 의식은 몽롱해져 있었으니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눈을 떴고, 바로 옆에 라켈이 있었고. 죽음을 느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오토는 머리카락에 찌른 손을 때리듯이 자신의 목덜미에 갖다 대었다.
“너, 내 목을 물었지. 송곳니 같은 걸로. 그리고 뭔가 빨아서….”
“불쌍한 멍멍이에게 다시 한 번 알려줄게. 난 뱀파이어야. 빤 건 뭔가가 아니라, 당신 피.”
흡혈귀가 다른 사람의 피를 빨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나오토라도 어디선가 봐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거냐? 난 어제 너한테 피를 빨려서… 흡혈귀가 됐다 그거야?”
“아직은. 당신은 완전한 흡혈귀가 아니야. 죽어 있지만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어중간한 존재야.”
“죽었다니…. 그럼 난 역시… 죽은, 거야?”
“뭐, 죽었지.”
자비심 없는 라켈의 긍정에 현기증이 났다. 동시에 분노 같은 것이 올라온다. 너무하다. 부조리하다. 받아들일 수 없다.
“자, 잠깐만. 너 그때, 살려 주겠다고 말했잖아?!”
피를 빨리기 직전 이야기다. 역시 의식은 몽롱했지만 그 부분은 똑똑히 기억한다.
“응. 말했어.”
“근데 죽었다고?!”
“아까부터 그렇다는 얘기잖아.”
“못 살았잖아?!”
“그럼 그대로 진짜 죽는 편이 나았어?”
“윽….”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나오토는 몸을 뒤로 젖히듯이 뺐다.
분명 라켈이 없었으면 자신은 지금 여기서 홍차 같은 걸 마시고 있을 수 없었겠지. 애초에 라켈만 없었으면 무인단지에 갈 일도 없었겠지만.
라켈은 다시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테이블에 놓았다.
“쿠로가네 나오토. 당신은 어제, 죽었어. 하지만 살아 있어.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내 목숨을 써서 살고 있기 때문이야.”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당신은 나와 『나』의 목숨을 공유하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고,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은 죽지 않아. 하지만 내 목숨이 다하면, 당신도 거기까지.”
“즉… 난 네가 죽을 때까지 쭉 이대로 라는 거냐?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로?”
“아니.”
“에, 아냐?!”
상상도 못 했던 대답. 너무나도 가벼운 대응에 잠깐 안고 있었던 나오토의 심각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눈앞에 라켈은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보여준다.
“어중간하게 있을 수 있는 건 1년 뿐. 1년 후 당신은 완전히 흡혈귀로 변해 버려.”
1년. 흡혈귀. 그 말을 들은 나오토의 머리가 의미를 찾듯이 몇 번이나 흔들린다.
“1년… 완전한 흡혈귀라니, 그렇게 되면 어떤데?”
“…인간이 아니게 돼. 당신은 아마 사람의 피를 원하게 될 거고, 지금의 나처럼 사람을 덮치지 않고 있을 수 있을 거라고는 말 못해. 어쩌면… 아니 아마, 당신은 누군가를 습격할거야. 그 때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 건,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이겠지.”
말하는 라켈의 이야기에서 나오토가 이해한 건 하나뿐이다. 만약 자신이 완전한 흡혈귀 뭐시기가 되어 버리면, 하루카가 위험해진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오토 자신의 손에 의해.
라켈의 입에서 나온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은, 나오토에게 있어선 하루카 이외엔 있을 수 없다.
어쩌면 죽여 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하루카가 죽는다. 그런 건 잠시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젯밤 본, 검게 변한 덩어리가 생각났다. 차가운 도로에 굴러다니는 그런 물체로, 하루카가 변해 버린다면. 자신의 눈앞에서 굴러다닌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나오토의 양손은 어느 새인가 꽉, 자신의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꽉 쥐여 있었다.
“뭐야, 그게…. 그럴 거면, 그런 미친 짓을 할 거면 기껏 살아나 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웃기지 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노성은 멋대로 목에서 넘쳐났다. 그렇지 않더라도 삭일 생각은 없다. 분노를 한 데 모아 휘둘러 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화가 난 나오토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진정해. 그리고 나를 부를 땐 『라켈 님』이라고 불러, 하인.”
“뭐라는 거야! 지금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거든!”
“나도 진지해.”
타이르는 라켈의 목소리가 강해진다.
“알겠으니까 들어. 당신은 1년 후, 인간이 아니게 돼. 『당신』이 아니게 된다고 하는 쪽이 맞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1년은 있어. 그러니까 그 동안에─ 『아오(蒼)』를 손에 넣는 거야.”
“…『아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오토는 지금까지보다 복잡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라켈이 맞장구를 치듯 가볍게 턱을 당겨 올렸다. 그녀의 긴 머리가 고상한 의상처럼 흔들린다.
“『아오』라는 건, 근원의 힘이야.”
개인 목소리가 공기에 스며들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수수께끼의 소녀라는 단순한 말로는 부족한 더욱 신비적인 분위기를 휘감고 있었다.
비슷한 또래 소녀로 보이면서도 다른 세계의 주민 같은 소녀는 나오토를 보며 이어간다.
“그것은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수많은 생명체는 물론 시간부터 모래알까지 모든 사물에 영향을 주는 힘. 또한 모든 『가능성』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야.”
“『가능성』? 그런 건 보통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고 하지 않나?”
말하는 방식이 신경 쓰여 나오토가 물으니, 라켈은 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고개를 젓는다.
“『불가능』은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는 것을 말하는 거야. 『아오』가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계의 다양한 차원에 존재하는 무수한 『가능성』 뿐.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옅은 가능성이라고 해도 현실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 그럴 마음만 먹으면 시간조차도 조작할 수 있어.”
예를 들면 오늘은 날이 맑지만, 날 밝자마자 바로 구름이 모여 소나기가 내릴 가능성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나오토가 침대에서 떨어질 가능성도 있었고, 이웃 주민이 간장을 빌리러 찾아온 덕에 라켈의 샤워씬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들 전부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오』라는 것이다.
“가능성만 있다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그런 뜻?”
“그래.”
“그럼 그것만 있으면 내가 흡혈귀가 되지도 않고… 아니, 지금 이런 어중간한 느낌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소리지?”
“응.”
짧은 긍정의 말에 나오토는 무심코 미소를 흘렸다. 어휴 놀래키지마 하고 농담을 할 생각마저 들었다. 어쩔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줄 알아 버렸잖은가.
단순하다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밝고 기분 좋게, 나오토는 해맑게 라켈을 바라봤다. 보니 컵 안이 비어있지 않은가. 한잔 더 줘야지 하는 친절심이 피어오른다.
“멋지다, 전지전능한 힘이라는 거잖아. 신이 되는 거네. 그런 게 있으면 빨리빨리 말하라고. 그래서 그 『아오』라는 건 어디 있는데? 뭣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찾으러 가지?”
“……….”
“…어.”
그때까지 기세 좋게 맘껏 돌아오던 대답이 갑자기 툭 끊겼다.
세계를 바꿔버릴 정도로 장대한 힘─ 『아오』. 그 존재와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를 아는 것 가지고 아까까지만 해도 득의양양한 태도를 풍기고 있었으면서.
지금 라켈은 여유로운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고, 그렇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듯 맑은 얼굴로 컵을 들고 있었다. 입을 대고서야 내용물이 빈 것을 떠올린 듯하다. 순간 금색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허둥지둥 컵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일련의 행동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건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은 특기가 아닌 나오토가 보기에도 역시 일목요연했다.
“…설마 해서 묻는 건데. 진짜 몰라?”
장난이지? 하고 나오토가 라켈을 들여다본다. 그러자, 그 오른쪽 뺨을 힘껏 꼬집어졌다.
“으갸아악! 뭔 짓거리야!”
“이, 입 다물어. 하인 주제에 건방지기는. 주인한테 입을 여는 자세부터가 돼먹질 못했어.”
“뭐가 주인이야! 주인이면 주인답게 하인에게 구체적인 지시 정도는 내려 보라고! 『아오』가 뭐? 어디 가서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 건가요, 주인님아!”
“그러니까 그걸 이제부터 조사하는 거야. 난 그것 때문에 이 마을에 온 거니까!”
테이블 위에 양손을 대고 몸을 내밀어 트집을 잡는 나오토를 쫓아내듯이 라켈은 벌떡 일어났다. 망토 아래에서 가느다란 팔을 꼰다.
나오토는 그것을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조사라니, 왜 이 마을인데?”
“이유까지는 몰라. 그냥…”
재미없다는 듯이 토라져 있던 라켈의 금색 눈동자가, 문득 힘을 빼듯이 먼 곳을 본다. 꼬여 있던 팔이 풀리고, 망토 안쪽으로 미끄러져 되돌아갔다.
“그냥, 이 마을에서 굉장히 강하게 『아오』가 느껴져.”
아오라는 건 느낄 수도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라켈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나오토는 수상쩍다는 듯이 거실을 돌아봤다. 이상한 손님이 와 있는 것만 빼면 그냥 거실이다. 아오 어쩌고 하는 정체도 모르는 힘의 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느낄 수 없다고 존재를 부정하고,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 누가 믿겠냐며 눈을 돌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일상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1년. 라켈이 말한 기한이 왔을 때,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의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말 것인가. 라켈의 이야기를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하루카의 목숨을 저울에 매달 수는 없다. 그런 일 만큼은 있어선 안 된다.
“어찌됐든 얘긴 알아들었어. 중요한 건 그 『아오』라는 것만 찾으면 만사해결이라는 거잖아.”
“그런 말도 되지.”
“그럼 우선, 딱 하나 『아오』보다 먼저 해결하고 싶은 게 있거든….”
말하면서 나오토는 결의를 굳혔다는 듯이 무겁게 허리를 들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라켈을 바라본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다.
“적당히 하고, 옷 좀 입어.”
언제까지나 알몸망토로 눈앞에 기웃거리면 눈 둘 곳이 어쩌고 하기 이전의 문제로 정신적으로 갉아 먹힌다. 게다가 이런 꼬라지를 만에 하나 하루카에게 들킨다면 어떤 오해를 낳을지 모른다.
나오토의 진지한, 동시에 위압적인 무게를 돌려주며 라켈이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왜?! 오히려 왜 반론이 나오지?! 난 남자라고, 남자 앞에서 알몸으로 있으면 부끄럽다던가 그런 거 없어?!”
“바보네. 애완동물 앞에서 알몸으로 있는 게 왜 부끄러워?”
“애완동물 앞에서도 옷은 입는다고! 아 진짜, 됐으니까 빨랑 입어!”
목소리를 난폭하게 하며 나오토는 자신의 옆에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던 옷가지를 라켈에게 밀어붙였다.
공교롭게도, 보단 당연하게도 이 집에 여자 옷 같은 건 없다. 따라서 옷장을 뒤져 잘 입지 않는 티셔츠와 비교적 최근에 산 반바지를 발굴해 왔다.
홍차를 타기 전에도 한 번 라켈에게 권했지만 그 때엔 한번 슬쩍 보더니 그대로 무시당했다.
“하인 주제에 이 나에게 명령? 역시 교육이 좀 필요하겠네, 이 잡종!”
달아 둔 인터폰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불쾌하다는 듯이 가느다란 눈썹을 좁힌 라켈은 흥, 하고 딴청을 피운다.
틈을 주지 않고 돌린 얼굴 정면으로 빙 돌아 나오토는 놓치지 않겠다며 망토 끝자락을 붙잡았다.
“쫑알쫑알 시끄럽네! 이쪽은 계속 참고 있었다고, 힘으로라도 입혀 주마!”
“누구 허락 받고 나한테 손을 대는 거야! 놓도록 해!”
“누가 놓칠 줄 알고! 자 슬슬 포기해라…!”
또 초인종 소리가 울렸지만, 연약한 전자음은 나오토와 라켈의 목소리에 묻혀 지워졌다.
“잠깐, 이상한 데 만지지 마!”
라켈은 강하게 팔을 당겨 붙잡은 손을 떨쳐내려고 하지만 그 정돈 나오토도 예상한 바였다.
이 손을 놓으면 녀석은 그대로 뒤돌아 밖으로 뛰쳐나가겠지. 이런 대낮에 우리 집에서 알몸녀가 튀어나가는 사건을 만들 순 없다! 고, 나오토는 필사적이었다.
“난 진지하다고…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해!”
“큿, 야만스런 남자 같으니! 이 변태!”
“불만이라면 나중에 들어 주지. 됐으니까 지금은….”
“당신 맘대로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착각이야!”
“뭐가 착각이냐… 엇.”
몸을 빼려고 꿈틀대는 라켈과, 그것을 막으려는 나오토. 소소하게 비비적대는 동안에 라켈이 발을 걸려 소파 위로 쓰러졌다. 그 위에서 덮쳐누르듯이 같이 쓰러진 나오토는 기세를 타 라켈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겼다. 그렇게 확신했다.
“크큭큭… 이제 못 도망치겠지, 라켈 야앙~?”
“하인 주제에 주인을 깔아 누르다니… 무례한 짓에도 정도란 게 있어! 지금 당장 비키도록 해!”
“…저기.”
“누가 하인이냐. 그런 말은 좀 더 위엄 있는 모습으로 하자고!”
“굴욕적이야….”
“흐하핫, 그렇다면 더한 굴욕을 맛보여 주도록 하지!”
“저기, 나오.”
“뭐야, 지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해, 하루…카….”
척수반사로 대답하고 나서.
나오토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몸이 얼어붙었다.
녹슨 기계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오토는 고개를, 녹슬어 삐걱거리는 고개를 움직여, 옆을 본다.
거실 입구에 소꿉친구가 서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뭐하는 거야, 나오?”
“아, 아니, 이건…”
휴일 대낮. 남고생이 혼자 사는 맨션의 한 방. 한 소녀가 소파에 쓰러져 있고, 그 위에 올라타서 소녀의 몸을 짓누르는 남자가 한 명 있다.
소녀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로 표현해야 어떠한 균형이 작용해 상식적인 전개가 있었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웃음을 띈 채로 하루카는 그대로 뒤꿈치를 돌려 부엌을 향했다. 곧 무언가를 손에 들고 돌아온다. 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보고 나오토의 온몸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 하루카 양? 그 손에 들고 있는 건 대체…?”
“잘 찔리는 부엌칼.”
“부… 부엌칼은 써는 용도가 아닌지…?”
“그것도 괜찮아.”
빙긋이 웃으며 하루카는 무척이나, 무척이나 애매한 거리에서 발을 멈췄다. 거실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장소에서 나오토를 바라보며 평소처럼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물어보는 방법이 잘못 됐던 것 같아서. 저기, 나오. 뭐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날붙이의 은색에 손등을 물들이는 소꿉친구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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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졌네요. 근데 더 느려질 지도 모름. 전 하루에 한 챕터씩 번역할 자신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제 2장 시작입니다. 시작부터 아오에 대해 그나마 구체적인 해설이 나왔네요.
그리고 라켈과 나오토의 관계. 나오토는 죽은 걸 라켈의 목숨을 소모해가며 일으켜 세운 상태에 불과한데다 1년 뒤엔 흡혈귀화 한다고 하죠.
또 아오가 있으면 이를 막을 수 있고, 라켈이 죽으면 나오토도 죽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본편 레이첼과 라그나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라그나는 과거에 죽었고, 그걸 레이첼이 흡혈로 살려냈다. 여기까진 같아 보이는데요.
라그나가 흡혈귀가 아닌 반 흡혈귀 상태를 유지하는 게 말이죠.
아오의 마도서 때문이라고 해도, 여기서 라켈은 아오를 이용해 나오토를 인간으로 돌려놓는다고 하고, 그렇다면 그냥 '있는' 것 만으론 효과가 없는 것 같으니... 으음?
아니면 레리우스가 만든 몸이 너무 짱짱해서 버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오 쪽이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요.
그래도 라그나가 레이첼의 목숨을 이용해서 살아있는 상태인 건 대강 맞는 듯 합니다. 본편에서도 레이첼이 자신을 죽이라는 말도 하니까요.
하여간 본편을 이리저리 생각나게 하는 챕터였습니다. 거의 소설 자체가 그렇지만.
중간에 궁서체는 원문에선 가타카나로 쓰여 있습니다. 영어로 쓸까 기울일까 굵게 강조할까 많이 생각해봤는데 그냥 궁서체로 했어요. 진지하게.
그런데, 보고 있자니 라켈은 그냥 레이첼보다 약간 순한 건지 아니면 낮은 전투력이 티나는 건지 나오토를 갈구는 게 라그나 갈구는 레이첼만 못하네요.
비단 대화중 공격뿐만 아니라 그냥 대화 내용으로도. 레이첼은 라그나가 뭐좀 물어보자 치면 그냥 욕하면서 전이해 버리는데 여긴 그나마 대답은 해줌.
좀 심사가 뒤틀려도 꼬집기라뇨. 어디사는 누구는 매일 번개에 싸대기에, 두들겨 맞고 이상한 데로 전이되는 게 일상이잖아.
쓰고 보니 불쌍하네. 주인공 인권은 누가 챙겨주지.
어쨌든 재밌게 보시고 댓글 하나씩 달아주세요. 제가 코멘트에 저리 설정덕질을 싸지르는 것도 소통을 원하는 몸부림의 일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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